2020년 1월의 어느 날
가이드들과 함께 에르타 알레 화산 트레킹을 위한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내가 탄 지프는 퍼밋을 받고, 지역 부족민들에게 돈을 지불하느라 돌아 왔는데, 다른 지프는 그 동안 뭘 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먼저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 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스캠프는 잔가지들로 엉성하게 지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곳이었는데, 움막 안에서는 헤드랜턴에 의지한 채 요리사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식사가 준비될 동안 주변을 둘러 보고, 멀리 화장실에 다녀 오기도 했다. 전기도 물도 없는 곳이라 화장실이 있을리 만무했다. 한 켠에는 낙타들이 짐을 싣고 있었다. 우리가 어제 나무 침대 위에 올려 놓고 사용했던 매트리스와 물을 낙타를 이용해 산 위로 나르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매트리스가 아니라 스펀지가 가득 채워져 있어 가벼운 매트리스는 제품을 포장한 비닐을 일부러 뜯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낙타 몰이꾼은 낙타를 데리고 우리보다 먼저 산 위로 출발했다. 짐을 운반하는 동물을 보는 건 항상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저녁 식사는 푸짐하게 준비 되었다. ETT 다나킬 투어를 갔다온 후기를 블로그를 통해 읽어보면 식사에 대한 악평이 많은데, 나는 입이 저렴한 건지 맛있기만 했다. 물도 없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음식이 차려지는 게 신기했고, 고마웠다. 헤드랜턴도 안 가져 온 나는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어둠에 적응해야 했다. 우리 투어 팀은 열 명이 넘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스라엘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친해졌다. 에콰도르에서 온 젊은이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은퇴를 하고 아프리카로 여행 온 부부라 나이가 꽤 많았는데, 화산 트레킹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녁을 먹은 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트레킹을 시작했다. 메인 가이드인 게레는 맨 뒤에서 이스라엘 노부부를 챙기며 올라왔고, 보조 가이드 빌리언은 나와 함께 선두에서 팀을 이끌었다. 여기도 총을 든 로컬 가이드 한 명이 우리 앞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나는 팀에서 뒤쳐질까봐 선두에서 에콰도르 남자와 함께 열심히 걸었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거기 앞에 너! 좀 천천히 걸어. 너무 걸음이 빠르다구!"
우리 팀 누군가 뒤에서 불평을 했다. 나는 보조 가이드와 군인 뒤를 따라 걸었기 때문에 내 걸음이 빠르다는 생각을 안 했지만, 뒤에서 보기엔 내 걸음이 빠르게 보였나보다. 별 신경 안 쓰고 열심히 걸었다. 출발한지 십 분 쯤 흘렀을 때
"야! 너! 좀 천천히 걸어! 올림픽 경기하러 왔냐?"
하고 아예 호통치듯이 한 서양 남자가 날 겨냥하듯 말했다. 선두엔 나 말고도 에콰도르 남자와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날 콕 찝어 이야기한 게 화가 났다. 그리고 난 가이드들 뒤를 쫓아간거라서 이런 말 듣는 게 불쾌했다. 화가 났지만 영어로 대응을 할 수 도 없었기에 말 없이 맨 뒤로 갔다. 거기엔 이스라엘 노부부가 메인 가이드 게레와 함께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게레는 이 상황을 보고 맨 앞으로 갔고, 보조 가이드가 맨 뒤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다시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난 이렇게 된 거 그냥 천천히 가자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노부부 뒤에서 걸었다. 처음에는 화가 치밀다가 걷다보니 화가 누그러졌다. 이게 바로 걷기의 힘이다.
이스라엘 노부부는 개인 가이드 한 명을 고용해서 여행 중이었다. 난 그가 가이드인 줄도 몰랐는데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았다. 노부부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부터 그를 고용해서 여행하다가 이 투어에 잠시 합류한 거 였다. 난 그 가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한 동안 걸었다.
"아직도 에티오피아 시골 지역에서는 여자가 시집갈 때 소를 받는 풍습이 있어."
"정말 신기하다."
"신부가 예쁘면 소를 많이 받고, 예쁘지 않으면 소를 덜 받지."
"믿을 수 없는 걸?"
"맞아. 이제 도시에서는 그런 풍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선 그렇게들 하지. 신부가 정말 정말 예쁜 경우에는 매 년 한 마리의 소를 신부 집에 계속 주기도 해."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가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쉬는 곳에 이르렀다. 그 동안은 넓찍한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 여기서 부터는 용암이 흐른 지대로 돌이 많고 미끄럽기도 했다. 트레킹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고, 날도 적당해서 땀도 흘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헤드랜턴이 없어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걷다가 어느 순간 달도 뜨고 눈도 어둠에 적응해서 맨 눈으로 걸을 수 있었다. 두 시간쯤 흘렀을 때 우리가 잘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미리 도착한 낙타가 쉬고 있었다. 잘 곳이라고 해 봤자, 그냥 길 옆에 돌들을 약간 치워 논 곳이었다. 말 그대로 길바닥이었다. 이런 곳에서 자게 될 줄 정말 몰랐다. 텐트를 치고 자는 것도 아니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노숙이다. 우리가 잘 곳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허름한 움막들이 여러 개 나타났다. 비가 오면 자는 곳인가? 여기에서 급 경사의 내리막 하나를 조심조심 내려가면 화산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검은 땅을 지나(용암이 굳은 대지) 드디어 에르타 알레 화산에 도착했다. 바람따라 움직이는 매케한 화산 가스 덕에 우리는 스카프나 마스크로 코를 가려야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화산 활동이 활발해서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르는 걸 코 앞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엔 화산 활동이 뜸 해서 육안으로 용암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린 저 만치 아래에 새끼 손톱보다 작게 빛나는 빨간 용암 두 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내 사진기로는 잘 잡히지도 않았다. 어제부터 대포 사진기로 사진을 열심히 찍던 서양 남자와 일본 남자는 그래도 열심히 사진으로 화산의 모습을 잡았다. 내일 새벽에는 조금 더 용암의 시뻘건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하면서 우린 아쉬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다시 잠자리가 있는 곳까지 약 20분 정도 걸어 되돌아왔다. 낙타가 싣고 온 얇은 스펀지 매트리스를 하나씩 배정 받아서 길 바닥에 깔았다. 난 이스라엘 노부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매트리스라도 주니 다행이었다. 맨 땅에서 자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우린 그렇게 화산으로 가는 길 옆에서 침낭을 덮고 노숙을 했다. 그냥 길 바닥이어서 세수를 할 수도 없었고, 화장실에 가기도 민망한 위치였다. 이런 건 난생 처음 겪는 일이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춥지 않으니까 얇은 침낭하나로 맨 공기를 견딜 수 있다는 거였다. 매트리스 위에 누우니 보름달이 코 앞이었다. 휘영청 뜬 달이 유난히 큰 밤이었다.
*유튜브에서 길 위에 서니를 검색하면 동영상으로 볼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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